본문 바로가기
에피소드

흥성장씨 흥덕장씨 족보

by 캐미불빛 2023. 3. 4.

(들어가며) 여기저기 떠도는 정보를 모아서 내 스스로 이해할 수 있도록 간략히 정리하였기에 실제 사실과 많이 다를 수 있음을 미리 알려드리니 지나가다 죽자고 달라들기 없기입니다. 나도 그렇듯이 또다른 누군가도 궁금해 할 수 있기에 알아낸 범위내에서 작성해 보았습니다. 언제든지 수정 가능하고, 얄팍한 내 지식의 한계도 너그러이 감안해 주시기 바랍니다 
 
 
□ 성씨의 출현
 
ㅇ 그리스신화에 제우스가 있다면 중국에는 황제헌원이 있다. 그와함께 농사와 의학에 통달한 염제신농씨(대략 BC 3000년)가 있는데 신농은 중국 강수(현 산시성)에서 살아 강씨의 조상이 되었다. 중국 강씨 중 가장 유명한 강상(강태공)은 은나라를 멸하고 주나라를 세울 수 있도록 도와 후에 춘추전국시대 제나라(현 산둥지역)의 임금이 된다. 현재 성씨 중 강, 고, 최, 허, 기 등 102개의 성씨가 강태공으로부터 출발했다고 한다. 국내에서도 염제신농이나 강태공을 조상으로 정하고 중국에까지 가서 제에 참여한다고 하니 의도와 다르게 엉뚱한 조상을 섬기는 경우가 아닌지 조심스레 우려를 표한다.

※ 우리 나라에서는 진주강씨가 유명한데 고구려 성씨라 한다. 번외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고집센 성씨로 안(순흥안씨), 강(진주강씨), 최(동주최씨)를 꼽는데 단순한 고집이 아닌 대부분 죽음으로 자신의 신념을 지킨 고집으로 무서울 정도다. 특히 순흥안씨의 일화는 후덜덜. 독립을 위해 왼손 약지를 자른 대표적 위인 안중근만 보더라도.

 
ㅇ 우리나라 성씨중 가장 오래된 성씨라 하면 기, 한, 선우씨라는 의견이 있다. 모두 고조선시대 기자조선* 기자의 후예로 특히 한씨의 경우는 삼국시대 백제로 통합되기 전 한반도 남쪽땅에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을 세웠다고 한다. 여기서 잠깐! 우리나라는 대한민국이라 칭합니다.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을 세울때 조선은 마한, 진한, 변한의 통합된 나라이다 라고 해서 대한제국으로 이후 대한민국으로 변경되었습니다. 한씨의 역사를 무시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 기자조선은 위만조선과 달리 역사적으로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


※ 한씨 중 유명한 청주한씨의 경우 멀리가지 않더라도 얼마전 37대 총리인 한명숙, 38대 및 현재 총리(48대)인 한덕수와 최근 가장 핫한 법무부장관 한동훈 등을 배출한 집안으로 조선시대 문과급제자만 315명이다

 
ㅇ 우리나라 성씨의 최초 출현 기록은 중국 남북조시대의 「북제서」란 역사서에 ‘김진흥을 신라왕으로 한다(서기565년)’로 기록되어 있다. 왕이 아닌 자는 성씨가 없었는데 후에 왕족 3성(박, 석, 김)과 귀족 6성(이, 최, 정, 손, 배, 설) 등 육두품 이상에서 성을 갖게 되었다. 발해는 왕 1성(대)과 귀족 8성(고, 장, 양, 두, 오, 이, 배, 왕)이 확인되고 있다. 발해와 신라의 사례를 참고하면 두 성씨가 겹치는데 이씨와 배씨이다. 과거의 배씨 위세가 놀랍다.

※ 우연인가. 배씨는 나라가 바뀔때마다 유명한 개국공신이 나온다. 고려 건국을 도운 1등 개국공신 배현경, 조선 건국을 도운 1등 개국공신 배극렴 등 나라가 바뀔 때마다 주도적 역할을 했으니 혁명가인가 아니면.....

 
ㅇ 고구려나 백제에서도 왕의 경우 고구려는 고씨, 백제는 부여씨, 여씨를 사용했다. 이후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태조(왕건*)가 각 읍 토정을 분정함과 동시에 신분질서를 유지하고 효과적인 징세, 조역을 위해서 성과 본관 제도를 활성화하였다. 하지만 일반 백성까지 성과 본관을 가질 수 있었던 건 아니었고 지방호족 이상의 특정 계층의 유력자에게만 허용하다가 고려 제11대국왕 문종(재위기간 1046-1083)때부터 과거제도**에 성과 본관을 기입하도록 하여 보급이 확대되었다.

* 왕건도 이름이었으나 후에 왕을 성으로 건을 이름으로 하였다. 본관은 개성
** 과거제도의 도입 : 제4대 국왕 광종(재위기간 949-975년)

 
ㅇ 백성(百姓)이란 일반국민을 예스럽게 부른 표현으로 정의되어 있다. 또 한편으로는 성씨의 출현당시 성씨가 백가지였다고 한다. 기록상 우리나라 성씨의 변화를 확인하면 1486년 조선 성종때 편찬한 동국여지승람에 우리나라 성씨의 수가 277성씨에서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 5,582성씨까지 확대되었다. 이는 귀화한 한자없는 성씨 4,075개까지 포함한 것으로 현재의 다문화주의 등 세계화에 따른 영향이 큰 듯 하다. 참고로 한국관광공사 사장을 지닌 독일인 이참(이한우)의 본적이 ‘독일’이다. 독일이씨는 자녀 포함 총 3명으로 이참씨 소원이 다산과 자손번창이 아닐까? 씨앗 하나하나가 귀중한 존재이겠다.
 
ㅇ 우리나라 성씨의 10위권 순위는 김>이>박>최>정>강>조>윤>장>임 이며, 이중 김이박이 전체 성씨의 대부분인 44.6%를 차지하고 있다. 즉 전국민의 반이 김이박 중 하나라는 것인데 장씨의 경우 순위가 9위로 낮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구성비율 2.0%에 불과하니 10위권 밖의 성씨는 얼마나 낮은 구성율을 보이는지 알 수 있겠다.
 
ㅇ 성씨와 관련 회자되는 천한 성씨라 하는 7개의 성씨 '천방지축마골피'라고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우선 이 성씨를 가지고 있는 분들은 얼마나 스트레스가 심할까. 국민 1명 1명을 다 설득해야 하는 수준이니. 특히나 시골에 계신 어르신들은 찰떡같이 믿고 있을텐데 성씨 관련 논하는 마당에 여기서라도 바로잡고 가야겠다. 이게 말이 되지 않는게 과거에 성씨를 가지고 있는 자체로 귀한 가문이었는데 불가촉천민이 어떻게 성씨를 가지고 있었겠는가. 되려 전국민의 45%를 차지하는 김, 이, 박씨 중에 가장 많은 비율이 섞여있을 것이다. 실제로 7개성씨중에 축씨와 골씨는 우리나라에 존재하지도 않는다. 방씨와 지씨가 천민이라는 것도 어불성설이며(고려거란전쟁의 지채문은?), 천마피씨에도 나라의 개국공신이나 양반들이 많았던건 역사에도 많은 기록이 있다. 부디 오해없으시길...

ㅇ 참고로 우리나라에서 장의 로마자표기는 보통 Jang으로 한다. 2011년 외교부 여권통계에 따르면 Jang이 75%, Chang이 25%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와달리 중국은 Zhang, 대만은 Chang이라 표기한다고 하니 새롭게 여권을 발급받을 분들이라면 중국인으로 오해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가급적 Jang으로 표기하는게 바람직할 것이다.

※ 새로운 성씨를 창조해 보자. (닥씨)닭보다 아름다운 새는 없다고 본다. 날지 못하지만 강인한 수탉을 보면 경건하기까지 하다. (붕씨)붕어낚시를 너무 좋아해서 월척 붕어를 그리며 붕씨. (돌씨)왠지 모를 강인함?

 
 
□ 본관의 출현
 
ㅇ 본관이란 조상대대로 살아온 삶의 터전, 거주지라 정의한다. 본관은 반드시 지명을 뜻한다. 누군가가‘본관이 어디오?’묻는다면 성씨를 빼고 ‘안동입니다’라고 답변하는게 바른 대답이다. A long time ago 한번 태어나면 그 삶의 터전을 쉽게 벗어날 수 없기에 본관과 성씨를 알면 혈연, 지연 관계를 파악하기 용이 했을 것이다. 즉 본관을 통해 씨족의 발생지뿐 아니라 그 씨족의 집단적 신분까지도 나타내는 역할을 했다. 의미가 많이 퇴색했지만 지금 이시기에도 통성명 후 여전히 본관을 물어보는 이유일 것이다.
 
ㅇ 나의 경우 어릴적 본관을 물어보면 흥성(흥덕)장씨 外 더 이상 답변할 수 있는 족보의 지식이 없어 전전긍긍했는데 어느덧 나도 지천명이 지나서인지 장씨를 만나면 어디 장씨냐고 본관을 물어보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상대방의 표정은 다를게 없이 안절부절하다. 물론 돌아오는 대답은 전국 장씨의 69%를 차지하는 인동장씨가 대부분이다.

※ 전국 장씨의 본관 구성 : 인동(약68.5%), 흥성(덕)(6%), 단양(4.5%), 안동(4%) 등(2015년 통계청)

 
ㅇ 개인적으로 세상에 모든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른들 말씀은 세대를 이어 온 시행착오의 결과물로 틀릴 확률이 적으며, 한 사람의 성격 등 성향과 지식, 지혜의 수준까지 알기 위해서는 피(유전자)보다 더 중요한게 없음을 세월이 지날수록 깨달아 가고 있다. 개천에서 용날때도 있겠지만 용이 나오는 곳에서 용이 나오고, 참외밭에서 참외를 찾아야지 똥밭에서 참외를 찾아봐야 똥만 묻을 뿐이다. 과학적으로도 유전자의 중요성은 일반 책으로도 접할 수 있다. 특히 리처드도킨스의 이기적유전자를 읽어보면 이해에 도움이 될 듯하다. 새로운 성씨 창조의 예시로 붕씨를 언급했듯이 민물낚시에 심취할 때가 있었다. 민물의 대표어종인 붕어를 찾아 헤맸는데 그 수고와 노력은 지금까지도 나에게 최고의 순간이었다. 좋은 장비와 갖가지 미끼로 몇날 며칠을 들이데 보지만 결론적으로 붕어 없는 저수지에서 붕어 빼고 다 나왔다. 붕어가 없는데 좋은 장비와 미끼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붕어가 나올 리 없다. 피(유전자)를 무시하지 못하는 이유다.
 
ㅇ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서 앞에서 말했듯이 성씨란 과거 일부 왕족과 귀족 등 지배층에서 사용하였고, 본관의 개념은 고려 태조 왕건(877-943)을 기점으로 본격화 되었으며, 고려 제11대 문종(1019-1083)때에 과거제도 시행과 맞물려 더욱 확대되었다. 당시 고려의 국경선을 감안보면 발해 밑 지금의 평양 근처로 그래서인지 본관 제도는 남한에서만 활성화 되었다.

※ 지금의 북한에서도 본관과 족보가 없다고 한다. 통일이라도 되면 본관 따지는 우리와 셈이 복잡해지겠다.

 
ㅇ 그렇다면 최초의 본관은 어디일까? 최초의 본관이 어디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대부분 급하게 중국의 성을 빌려와서 사용 후 본관 또한 급하게 만들다보니 역사적 기록을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현재 우리나라의 본관의 규모를 따진다면 김해 김(9%), 밀양 박(6.6%), 전주 이(5.7%)씨 순이다.
 
ㅇ 지금의 고창지역이 본관인 흥성장씨와 흥덕장씨는 같은 종파*이다. 흥덕은 지금의 전북 고창으로 현재도 서해안고속도로 선운산IC 옆에 흥덕면이 위치해 있다. 과거로 올라가보면 고창군 흥덕면(1914년) < 흥덕군(1895년 조선고종32) < 흥덕현 또는 흥성현(1401년 조선태종1년) < 흥덕(1308년 고려충선왕1년) < 장덕현(1018년 고려현종9) < 상질현(757년 통일신라 경덕왕16) < 상칠현(백제) 으로 지명의 변천을 확인할 수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행정구역의 변천이 계속 되었는데 고창과 합쳐지기도 하고 분리되거나 전주 또는 전라남도에 편입되기도 하는 등 변화가 많았다. 앞으로 많은 시간이 흘러 고창장씨가 새롭게 나오지 말란 법도 없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제주도에서 근무할 때 제주를 본관으로 제주장씨를 생각해본 적도 있다. 아주 오래전 백제의 견훤과 후고구려의 왕건이 대세를 결정하는 전투로 고창전투(929년)를 치루었는데 여기서 말하는 고창(高昌)은 지금의 전북 고창(高敞)이 아닌 경북 안동의 옛 지명으로 지금의 전북 고창과 어떤 연결고리가 있을까 막연한 호기심이 발동한다.

* 2015년 기준 흥덕장씨 약 3.7만명, 흥성장씨 약 2.2만명으로 합 6만명선


※ 사회생활하면서 흥성(흥덕)장씨를 딱 1명 만났다. 나보다 한참 나이가 있고 회사 선배로서 대하기 어려웠지만 부족한 나를 항상 챙겨주셔서 퇴직하신 지금도 가끔 연락하고 있다.

 
 
□ 족보의 출현
 
ㅇ 동일한 씨족 중에서도 본관을 중심으로 시조 이하를 기록한 것이 족보이다. 족보의 출현은 역시나 중국에서 시작되었으며 왕실의 계통을 기록한 것이 출발이다. 그러고 보면 지금이야 탈중국을 외치지만 과거로 갈수록 중국의 영향이 막강했다. 중국이 아니면 우리가 어떻게 문명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을까. 일제치하 35년보다 중국의 600년*을 경계해야 한다고 한다. 지금 이시기 부강한 대한민국이 앞으로도 계속 뒹국보다 모든 분야에 앞서 나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 1898년 세워진 서울 서대문의 독립문을 일제로부터의 독립을 뜻한다고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일본이 아닌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기원하는 기념물이라는 사실과 독립문이라는 현판글씨가 이완용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기 바란다.

 
ㅇ 우리나라에서는 1476년(성종7년) 안동권씨의 「성화보」가 최초의 족보로 알려져 있다. 성화는 안타깝게도 당시 명나라의 연호이다. 가문을 앞세우는 우리나라에서 「성화보」보다 먼저라고 주장하는 족보가 나오질 않는 걸 보면 현재 존재하는 최초의 족보가 맞을 것이다. 족보가 활성화된 건 1565년(명종20년) 문화유씨의 「가정보」부터라 하는데 전해지지 않고 있다. 확인된 최초의 족보 출현이 15세기이니 그 이전의 조상들을 찾는다는 게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폐단으로 오래된 역사속 인물인 중국인을 시조로 모시는 모순이 발생하는게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그뿐인가 1646년 수봉이라는 노비가 김해김씨와 안동김씨로 본인과 후손들의 신분을 세탁한 사건이 확인되어 널리 알려지는 등 잘못된 거짓 족보도 빈발하게 된다. 거짓 족보는 조선후기, 구한말, 일제시대에 와서는 너무 비일비재하여 논란의 대상 자체가 되지 않는다.

※ 중국의 역사책 사기 읽는 걸 좋아한다. 그럴때마다 사마천의 위대함을 칭송한다. 사기에 나오는 인물 중에서는 한의 장량과 월의 범려를 좋아한다. 특히 한나라 개국공신 장량의 일화를 읽으며 장씨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조상이 아닐까 바란 적도 있다. 우리에게 개족보가 많은 이유일 것이다. 참! 장량의 후손으로 국내에 절강장씨가 있다. 살짝 부럽다.

 
ㅇ 흥성(흥덕)장씨의 족보(대동보) 「경오보」는 1750년 장석, 장우흡이 간행하였다. 서문에 따르면 초보만 해도 4회에 걸쳐 작성하는 등 비교적 오래전부터 작업이 진행되었으며 안동장씨 족보와 동일하게 장보고와 함께 장보고의 부 장백익이 선대로 기록되어 있다.
 
 
□ 장씨의 출현
 
ㅇ 중국의 「성관전고」등 여러 문헌에 따르면 고대중국의 황제헌언씨의 제9자인 청사가 휘를 낳았는데 장씨가 되었다라고 기술되어 있다고 한다.(사실 확인 못함)
 
ㅇ 우리 역사에 가장 유명한 장씨라면 한․중․일 3개나라 역사에 모두 등장하고 한중일에서 모두 기념하는 한국사의 최초의 호족, 지방의 유력자 장보고*일 것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이름만 궁복이였는데 중국에 가서 활동할 때 중국의 성 중에서 장삼이사 중 하나인 장을 따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실제 성이 없었는지 원래부터 장씨였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참고로 중국의 장씨와 우리나라의 장씨는 대부분 상관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 그래서인가 중국 공산당 간부와 대화하던 중 상대가 장씨임을 알고 나도 장씨라고 무모한 도발을 했는데 냉담한 반응이었다(그래서 어쩌라구?)


* 중국 산둥반도 적산법화원에 가면 장보고유적지가 있다. 장보고동상과 해신동상이 있는데 해신동상은 아파트 15층 높이라 하니 언제가 방문해 보고싶다. 이와달리 전남 완도에 설치된 장보고 동상은 작고 초라하여 무슨 홍길동인줄..일본에서는 국보로 관리 중인 '신라명신좌상'이  실제 장보고의 모습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한중일 3국의 장보고 얼굴에 나타난 공통점이 눈이 처지고 얼굴이 길쭉한 편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왠지 동질감을 느낀다. ㅋ

 
ㅇ 안동장씨는 물론 흥성(흥덕)장씨 족보에도 장보고를 선대로 기록하고 있다. 다만 장보고가 죽은 841년이후 도시조 장정필(장보고의 고손 또는 5대손이라는 등 세계가 불분명하다) 출생일 888년까지는 겨우 40여년의 짧은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장보고와의 구체적 연관성 및 그 사이의 선후대를 꼼꼼히 언급할 수 없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ㅇ 장보고....현재 우리세대에서 장보고를 모르는이가 없지만 그렇다고 장보고에 대해서 아는 것도 상당히 제한적이다. 출생이 780년, 사망이 841 또는 846년으로 추정하고 있으니 대략 환갑정도의 나이에 돌아가셨다. 아들 장우와 딸 장의영, 장혜영과 손자 장첨, 그리고 후대의 장원과 그 아들 장정필 정도로 알고 있으며, 두 딸의 경우 장보고의 사망 원인을 제공한 제45대 신무왕과 제46대 문성왕의 왕비로 거론되었던 인물이다. 특히 역사적 논란이 되는 제47대 헌안왕(재위기간 857-861년)의 후비가 장보고의 딸이라고 하고, 그 아들이 궁예라 추정하고 있다.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의 외할아버지가 장보고, 예전 궁복일 수도 있다고 한다.  궁복과 궁예 조금은 혼란스럽다. 그래서였던가 궁예는 자신을 버린 신라를 그렇게나 미워했다.  역사란 무릇 승리한 자의 조작에 불과하다는 썰과 같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나오는 부분으로 장보고 모두를 평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예로 조선후기 실학자 안정복의 '동사강목'에는 장보고를 죽인 염장을 도적으로 신라 문성왕을 간신들에 놀아난 못난 왕으로 기록하고 있다. 장보고 사후 자손에 관한 기록은 거의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김해김씨 족보에 김수로왕 19세손 김성해*의 부인이 장보고의 딸로 옥산장씨라 기록돼 있으며, 본관 옥산은 이후 인동으로 바뀌었다. 이처럼 장보고의 딸들은 당시 여러 왕족과 귀족들과의 혼례를 통해 세력을 확보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 신라 제47대 헌안왕, 제48대 경문왕, 제49대 헌강왕때 벼슬을 하였다

* 장보고의 사망과 관련하여 일본의 '속일본후기'에는 장보고의 부하인 이충, 양원이 일본으로 도망쳐 왔는데 이들이 장보고가 841년 11월 염장에 의해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염장이 청해진을 차지하고 일본에게는 이충과 양원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온 재물 등을 내놓으라 했으나 일본측이 거절했다고 한다.

 
□ 장씨의 도시조* 장정필(888~)

* 장씨의 시조로 알고 있음

 
ㅇ 중국 절강성(현 저장성) 소흥부 용흥 출신(확인하기 쉽지 않음)으로 국내에서는 현재의 안동(옛지명 고창)에서 후삼국 왕건을 도와 후백제를 물리치고 고려 건국에 기여한 바가 커, 당시 안동의 김씨, 권씨와 함께 고려의 개국공신으로 삼태사*에 봉해진 한 분이다. 김씨와 권씨에 비해 특별한 벼슬이 없음에도 삼태사에 봉해진 걸 보면 진정한 안동의 토박이 호족이 아니었을까 싶다.

* 태사란 고려시대 공신, 고위관직에게 부여한 정1품 관직이나 특별히 정해진 일 없이 명성으로 벼슬을 받는 지금으로 따지면 명예직 정도로 볼 수 있다. 고려 개국과 함께 1등공신(최응,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은 아니지만 2등공신의 한 명이다(유금필, 김선평, 장정필 등등)

 
ㅇ 장씨 중에서 중국에서 들어온 덕수장씨(중국위구르), 절강장씨(한나라 개국공신 장량의 후손), 태원장씨(중국산시성), 농서장씨(중국간쑤성) 등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우리나라 장씨는 안동장씨에서 분파*되었다.

 

* 인동장씨는 아니라고도 함

 
ㅇ 기타 도시조 장정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안동장씨와 관련된 내용을 검색하는 것이 더 빠를 것이다. 검색하면서 안타까운건 삼태사의 한 명인 안동권씨, 조선후기를 좌지우지한 안동김씨와 달리 안동장씨 후손의 역할이 현대에 가까울수록 미미하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문과급제자를 보면 초라할 정도로 삼태사 당시 안동의 성주인 김선평, 왕건에게 성을 하사받은 신라의 왕족후예 판관 권행과 달리 지방호족 장정필로 구별해보면 아무래도 다른 두 태사에 비해 위세가 떨어지는 모양새다.
 
 
□ 흥성(흥덕)장씨 관시조* 장유

* 본관이 같은 장씨의 시조

 
ㅇ 후삼국시대 백제의 영주(지금의 고창. 흥성의 옛이름) 상질현 출신으로 후삼국시대 난을 피해 중국 오월로 피난 갔다가 중국어를 배운뒤 고려 태조때 환국하여 예빈성에 있으면서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일을 전담하였고 이후 고려의 제4대 국왕인 광종(재위기간 949 - 975년)때 광평시랑(현 차관급)이 되었다고 하는데 확인은 어렵지만 고려사에 광종이 장유를 신임한걸 보면 예빈성경에서 사후이후 광평시랑으로 추증하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ㅇ 장유가 통일신라말 917년 태생으로 추정하는데 도시조 장정필과 29년 차이가 난다. 도시조 장정필의 9대손이라는 설도 있는데 29년의 차이를 감안하면 논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도시조 장정필이 왕건을 도와 고려태조 삼태사에 봉해졌다고 분명 기록되어 있는데 그로부터 9세손이후 장유가 난을 피해 중국에 갔다가 다시 고려 태조때 환국하였다고 하니 도시조 장정필과 관시조 장유가 같은 시기 사람이란 말인가? 안동장씨 장정필의 9세손은 장보로 고려 제13대 선종7년 9월 3일생 즉 서기 1,089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계산해보자. 산술적으로 9세손이라면 1세대를 30년으로 1세손 장정필로부터 240년이 지나야 한다. 즉 장정필 탄생 888년부터 제17대 국왕 인종의 재위기간인 1,128년에 출생한 것으로 추측되며, 1세대를 20년으로 폭넓게 해석할 경우에도 160년이 지난 제11대국왕 문종의 재위기간 1,048년경 출생이 될 것이다.(참고로 고려 국왕 11대와 17대까지의 재위기간이 76년에 불과) 시조 장유의 광평시랑 벼슬이 고려 광종때라 했으니 광종의 재위기간 949-975를 감안할 때 30년 계산은 터무니없고 20년으로 계산할 경우에도 광종 마지막 재위년도인 975년에 광평시랑이 됐다고 해도 73년의 차이가 난다. 안타깝게도 시조의 광평시랑 계산을 아무리 폭넓게 해석한다해도 도시조 장정필로부터 1세대간 11년으로 계산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도시조 장정필의 경우 안동김씨, 안동권씨 등과의 삼태사 사례가 있으니 출생년도가 실제와 다르지 않을 것이고, 그 아들 장연우가 엄연히 고려사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틀리지 않을 것인데 족보 세대간의 계산이 산술적인 계산방법과 다른것인지 속시원한 논리를 제시하지 못해 내 스스로 안타깝다. 예로 고려 태조때 환국하였다 했는데 그때는 도시조 장정필 40대초반으로 장유가 9세손이 아닌 3세손 정도가 적당할 것이다. 광종때 벼슬을 했다면 5세손이 합리적이다. 그때 장정필 나이 80초반으로 이해가 된다. 또 다른 검색에서는 객성(예빈성. 외국 사신 영접 역할 등)의 관원으로 사후 광평성 시랑(광평성의 차관급)이 증하였다고 하는데 「고려사」장연우편에 보면 장유에 대해 광평시랑이라는 구체적인 벼슬을 언급하지 않고 객성의 관리라고만 기록되어 있으며 어느 방송(KBS 대하드라마 ‘태조왕건'의 후속작으로 2002년'제국의아침’)에서 예빈성경(종3품) 장유로 짧게 등장하기도 한다.(등장인물을 직접 확인하기 위하여 조만간 94부작을 봐야하는가 고민중?) 또다른 여러 기록에서도 광평시랑(현 차관급)이라 하지만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기 쉽지 않다. 실증적 사료의 확인이 가능하도록 앞으로도 꾸준히 고증되어야할 것이다. 전북 고창군 성내면 조동리에 묘가 있으며 3.20. 향사하고 있다.

번외로 광평성에 대해 알고 가야겠다. 우선 고려의 최고집무기관은 최초 1) 광평성에서 2) 내의성과 3) 내사문하성을 거쳐 4) 중서문하성(문종15년 1061년)으로 변하였다. 광평성의 벼슬은 최고인 광평시중>광평시랑>광평낭중>>>순으로 되어 있으며, 태조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후 태봉(궁예가 세운 나라)의 관제를 이어받아 백관을 총괄해서 정치를 널리 평의할 목적으로 설치(918년) 하였으며, 유력한 호족들을 대변하는 정책 결정기관이라는 견해도 있다. 태조때 정부부처는 3성체계로 광평성과 함께 내봉성, 내의성으로 운영되었으며, 이후 성종1년(982년)에 광평성을 폐지하고 어사도성으로 이후 성종14년(995년)에 상서도성으로 변경되었다.  이와 달리 예빈성은 또다른 관청으로 태조4년(921년)에 설치되고 성종14년(995년)에 객성으로 변경된 후 다시 예빈성으로 복구되고 충렬왕 24년(1298년)에는 전객시로 공양왕2년(1390년)에는 예빈시로 바뀐다. 문종(재위 1046-1083년)때 예빈성 관제를 참고하면 판사(정3품)>경(종3품)>소경(종4품) 각 1명이 있고 그 아래 승(종6품) 2명 등 편성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시기별 편제나 관제를 살펴보면서 조상님 벼슬의 사실여부를 살펴보는것도 도움이 되리라(내 스스로 판단하기에는 확인할 자료가 넘 부족하다. 고려사 등 역사서에 기술되어 있는게 제일 정확할 듯 한데 확인하지 못하였다)

 

* 족보에서 말하는 세와 대는 다르다. 세는 시조를 포함하며 이와 달리 대는 시조를 제외하고 표시한다. 예로 28세손이라면 시조를 포함하여 28번째 자손이며, 28대손이면 시조를 제외한 28번째 자손이다

 
 
□ 관시조 장유의 아들 장연우(~1015)
 
ㅇ 전북 고창 흥덕(당시 상질현) 출생으로 이 어른에 대해서는 조선전기 60여년(1392~1451)에 걸쳐 고려왕조의 역사를 서술한 「고려사」의 열전 ‘황보유의’편을 참고할 만 하다.
 
ㅇ 요약하면 1010년(현종 원년) 이래로 군비가 크게 증액되었기 때문에 관리들에게 지급할 녹봉이 부족해지자 1014년 황보유의가 중추원사 장연우와 함께 건의하여 경군의 영업전을 빼앗아 녹봉에 충당하기로 하여 무관들이 크게 불만을 품게 되었다. 이에 상장군 김훈 등이 궁궐로 난입해 황보유의와 장연우를 결박하고 매를 때려 거의 죽게 하였다. 왕을 면담하고 왕은 두려워하여 황보유의와 장연우를 제명하고 귀양 보냈다. 이후 1015년 김훈 등이 처형된 후 다시 복직되어 호부상서(현 장관급)가 되었으나 그 해 사망하였다. 이에 6부(이부, 병부, 호부, 형부, 예부, 공부)를 관장하는 상시성(현 국무총리실)의 상서우복야로 추증되었다. 고려 현종때 거란의 침입으로 현종을 모시고 나주로 피난을 가는 등 어려움을 함께하여 어사대부(현 감사원장)가 되었다가 1015년 호부상서(현 장관급)가 되었으나 아무래도 고문의 후휴증 등으로 인해 그해에 사망하신 듯 하다.
 
ㅇ 아울러 「고려사」열전의 황보유의 부 장연우편을 살펴보자. 장연우는 영주(지금의 고창군) 상질현(지금의 고창 흥덕면)사람이다. 신라말에 부친 장유가 중국 남부의 오월로 피난갔다가 귀국했다. 광종은 그가(장유) 중국어를 잘 하므로 여러차례 객성의 관리로 임명하였으며, 중국사신이 오기만 하면 반드시 장유를 시켜 그들을 접대하게 하였다. 장연우는 행정실무에 밝아 그 재간으로 능력 있다고 칭송을 받았다. 뒤에 호부상서를 지내다가 죽자 상서우복야를 추증하였다
 
ㅇ 현재 흥성(흥덕)장씨의 시조를 장유로 정하였으나, 과거 문헌 중 일부는 장연우를 시조로 정할 정도로 중요한 어른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려 성종때에 문과에 합격해 여러 요직을 거쳤다. 1010년(현종1년)때 병부시랑으로 30만 대군을 이끌고 거란병을 통주에서 방어하였다.

※ 고려 현종의 피난생활은 조선 선조의 피난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어려움을 겪은 듯하다.

★ 요즘 넷플릿스 '고려거란전쟁' 보시면 이해가 빠를 듯 합니다

 

조상님은 문학에도 조예가 깊으신 듯 하다.
(한송정)을 들어보자

-달밝은 한송정의 밤(월백한송야)

-파도 잔잔한 경포대의 가을(파안경포추)

-애달프게 울고가는 건(애명래우거)

-한마리 신의있는 모래 갈매기(유일신사구)

님을 그리워하는 글로 강릉경포가 무대인걸로 보아 무관 김훈의 난때 유배를 강릉으로 갔는데 이때 지어진 시가 아닌가 싶다. 임금을 걱정하고 자신을 신의있는 갈매기로 표현하여 충절을 노래하고 있다.

현재 전북고창성내동촌길31-10에 장연우를 기리기 위해 충절사란 사당이 세워져 있다(한송정노래비도 세워져 있음). 음력 3월19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그의 아들 장인과 장심은 병부상서(국방부장관)를 역임한다

□ 본관 흥성(흥덕)의 출현
 
ㅇ 장유의 6세손 장기가 평장사(중서문하성의 정2품 관직)를 역임한 후 흥산군(흥성의 별호)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흥성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고려시대 평장사의 경우도 직위가 구별되는데 어떤 평장사인지 확인되지 않는다. 흥산군은 무엇이고 언제시기일까? 언제 어떤 후손들이 본관을 흥성으로 관시조를 장유로 정했는지 내 스스로 아직까지 파악하지는 못했다. 앞으로 더 매진하거나 지혜로운 자들이 많아져야 할 이유이다. 특히 세계가 불투명한 중시조 장영 이전의 조상에 대한 기록 찾기가 활발해져야 할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안동장씨는 물론 흥성(흥덕)장씨 족보에도 장보고를 선대로 기록하고 있다고 했는데 특이하게도 장보고가 당나라에서 신라에 들어와 신라인이 당에서 노비로 매매되고 있는 문제를 지적하며 청해진(828년)을 만들어준 왕이 신라 제42대 흥덕왕(추정 777~837년)이라는 것이다. 흥덕장씨의 흥덕(興德), 즉 고창의 옛지명 흥덕과 어떤 연결고리가 있을까. 757년에는 상질현이었다.

참고로 고려의 중서문하성에는 종1품 중서령과 문하시중이 있었는데 추증인 중서령을 제외하고 실질적 장관업무는 문하시중이 담당하였다. 아울러 그 밑에 정2품으로 4명의 평장사가 있었는데 문하시랑평장사, 문하평장사, 중서시랑평장사, 중서평장사이다.  그 아래 종2품직으로 참지정사, 정당문하, 지문하성사 라 하여 이들 모두를 재상이라 불렀다.
 
 
□ 중시조* 장영(1291~ 고려충렬왕17년)

* 가문의 흐름이 끊기거나 쇠퇴하여 이를 다시 일으킨 조상을 다시 시조로 지정

 
ㅇ 시조 장유의 11세손이다. 안타깝게도 어떤 조상이신지 자세히 알수 없다. 다만 진헌사(현 외교사절)로 중국에 가서 중국황제에게 많은 상을 받아 귀국하여 관직이 3품에 이르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조선 중종25년 1530년) 흥덕현 편이 아닌 용안현 편 인물에 기록이 남아있는데 그 내용을 정리해 본다. - 고려 장영은 진헌사로서 원나라에 들어갔는데 주선하는 것이 예에 알맞으니 황제께서 포상하여 특별히 백호에 제수하고 곧 천호로 승진시켰다. 말40두, 소25두와 수레5량, 화살2부를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도록 명하였으며 벼슬이 3품에 이르렀다 – 3품의 직위가 무엇인지 확실치 않으나 중랑장이라고도 하는데 고려 중랑장*은 정5품 무관직으로 3품과의 차이가 있고, 당시 고려에서는 문관이 무관의 직책까지 수행했다고 하니 정확한 직위의 확인이 필요해 보인다. 아무튼 계대가 불분명한 장연우 이후의 세계는 생략하고 세계가 정확한 장영을 중조로 하여 흥성(흥덕)장씨 25개 파조**가 생겨난 걸 보면 중국과의 교류 등을 통해 많은 부를 축척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장보고이후 우리 조상님들은 지금의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어학 실력을 겸비하셨던 듯 하다. 피(유전자)가 중요하다고 하더니 어학에 담을 쌓은 내 피는 뭐란 말인가

* 중랑장 : 고려의 군사편제는 2군 6위로 구성되어 상장군(정3품)>대장군(종3품)>장군(정4품)>중랑장(정5품)>낭장>장사>별장 등등으로 중랑장은 장군 1명에 2명의 중랑장을 두었는데 지금으로 치면 연대장급 정도가 아닐까 추정해 본다.


** 시중공파, 둔암공파, 중직공파, 직장공파, 참봉공파, 야우공파, 송정공파, 진사공파, 사성공파, 경력공파, 서윤공파, 사직공파, 현령공파, 좌랑공파, 사과공파, 부장공파, 감사공파, 제주파, 곡성파, 주부공파, 돈암공파, 기장공파, 참군공파, 판서공파, 문간공파 등

 
ㅇ 흥성장씨는 중시조 장영을 1세손으로 하고 있다. 시조 장유가 아닌 중시조 장영을 1세손으로 했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추측하건대 처음 족보를 만들 당시 확인된 시조가 장영이었으나 후대에 윗대의 선조인 장유, 장연유가 확인된 것이다. 그러나 장연유이후 장영까지 선대가 불분명하여 장영을 1세손으로 하지 않았을까 추정해 본다.
                                                                                                                                              

(나가며) 처음 시작이 내 위로 누가 계실지 궁금했고 내 아래로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도록 읽히게 하고 싶었다. 저출산사회 가족간 유대관계가 약화된 시기, 흥성(흥덕)을 본관으로 하는 장씨 누군가라도 조상에 대한 이해를 돕게 되면 좋겠다라는 생각으로 가이드하고 싶었다. 조상의 출발이 누군인지 장량 등 멀리 중국의 인물까지 찾아가 보고 싶었으나 장보고에게도 미치지 못하는 짧은 기록에 흥미를 잃게 된 것이 조금 아쉬웠다. 그래도 이런 사실을 조금이나마 알게된 내 스스로가 뜻깊은 공부이기도 했다. 글 여기저기에 나의 안타까움을 표했다. 족보의 사실여부 확인이 쉽지 않은 부분이 많았다. 아무런 지식과 변변한 기록도 없는 백지상태에서 족보를 편찬한 조상님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다들 알고 있듯이 15세기 족보가 출현하고 18세기 가짜 족보가 성행하며 일제 강점기에는 모든 이들에게 성씨와 본관을 표기하도록 함에 따라 급조된 족보가 비일비재하였다. 제대로 만든 족보조차도 의도치 않게 잘못된 정보나 확인되지 않는 정보가 많은 사실은 족보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보완하며 나가야 할 후손의 과제가 아닐까 한다. 아울러 잘 만들어진 족보가 아닌 사실에 입각한 족보를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잘못된 기술로 인해 신뢰성을 잃어버리면 족보 전체의 의미가 퇴색할 것이다. 과거 어느 기사에 ‘족보 편찬에 과장이 심하면 오히려 조상의 행적에 먹칠하는 꼴로 족보 편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이 점을 명심해 둘 필요가 있다’(’06.5월호 월간ㅇㅇ 김정연)라며 현재나 미래에도 잘못된 족보의 출현을 경고하고 있다. 이런 족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더 부단히 노력하여 부족한 점을 보완하고 완결성을 갖춰 나가야 할 것이다. 족보는 현재진행형으로 그 완결성의 책임은 우리에게 있을 것이다.

 2023. 3월 어느날.  끝.
 

 


 * 위 사진 설명 : 왼쪽은 추사선생 오른쪽은 초의선사(장우순할아버지)입니다. 제주 대정에서